검색결과
-
구미교육지원청, 신흥무관학교 독립군으로 안보의식 강화[구미인터넷뉴스]구미교육지원청(교육장 이성희) 직원 40여 명은 28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을 방문하여 2022년도 공직자 안보 현장 탐방의 시간을 가졌다. 안동에 소재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1894년 갑오의병부터 1945년 조국 광복 때까지 51년간 펼쳐진 경북 사람들의 국내·외 독립운동이 담겨져 있다. 의병항쟁을 시작으로 국채보상운동, 자정순국, 만주지역 항일투쟁, 6·10 만세운동, 의열투쟁, 한국광복군 등 항일투쟁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켜온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이어 참가자 40여 명은 기념관 내 신흥무관학교 체험프로그램으로 독립군의 훈련과정과 청산리전투 체험으로 애국정신을 함양하였다. 이날 현장 탐방에 참석한 새내기 공무원 최준기 주무관은 "이번 견학을 통해 공직자로서 안보 의식을 더욱더 높여 국가 비상시 위기 대응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김종성 기자 gumiin@hanmail.net
-
(사)왕산기념사업회 주관 왕산 허위선생 순국 113주기 추모제 봉행![구미인터넷뉴스}구미시(시장 장세용)는 왕산 허위선생 순국 113주기를 맞아 10월 21일 09:30 (사)왕산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왕산허위선생기념관 내 경인사(사당)에서 추모제(향사)를 봉행하였다. 추모제(향사)는 코로나19로 간소하게 진행되었으며 장세용 구미시장이 초헌관, 김재상 구미시의회 의장이 아헌관, 우연식 대구지방보훈청 보훈과장이 종헌관으로 참여하였고, 왕산선생의 유족 등 20여 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왕산 허위선생(1855~1908)은 구미시 임은동에서 출생하였다. 유학자이자 대한제국 시기 평리원 수반판사, 재판장(오늘날 대법원장), 비서원 승(대통령비서실장) 등의 관직에 재직했다. 선생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의병을 일으켰으며, 전국 의병장과 연합한 13도 창의군을 결성, 의병총대장으로 서울로 진격했으나 실패,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제1호 사형수로 순국했다. 서울시는 이를 기려 서울의 동서를 관통하는 주요 도로를 '왕산로'라 명명했으며, 1962년 대한민국은 왕산허위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제1호)을 추서하였다. 왕산선생의 일가도 왕산허위선생뿐만 아니라 수많은 항일 운동가를 배출하며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날 추모제(향사)에 초헌관을 맡은 장세용 구미시장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신 왕산 허위선생의 숭고한 나라사랑과 희생정신을 실천하신 왕산선생뿐만 아니라 왕산가의 모든 분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고 했다. ■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한 왕산가(家) ▹독립운동에 투신한 위대한 형제들 왕산 허위 선생의 큰형(허훈 선생)은 진보에서 일으킨 의병의 창의장이었고, 셋째 형(허겸 선생)은 왕산 선생의 김산(김천) 의병과 방산 선생의 진보 의병 때 참여한 것을 비롯해, 신민회 회원으로 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학교 설립,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왕산 선생의 순국 이후 일가는 일제의 감시와 핍박의 대상이 되었고, 구미에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허겸 선생은 유족과 사촌 형제인 허형, 허필 선생 등의 일가를 데리고 만주(서간도)로 이주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이회영, 이시영 선생 등의 신민회가 추진 중이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합류했다. ▹왕산일가 독립운동 대를 이어가다 왕산 선생의 장남(허학 선생)은 21세의 나이로 경기도 연천에서 왕산 선생이 일으킨 의병에 참여했다. 1913년 독립의군부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으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둘째 아들(허영 선생)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광복군으로 활약했고, 셋째 아들 (허준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총무와 경리부장을 맡았다. 허준 선생은 한때 김좌진 장군 집에서 함께 거주하며 청산리전투에서도 활약했다. 넷째 아들 (허국 선생)도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했다. 왕산 선생의 사촌형제인 허형 선생은 1906년 오적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의 아들인 허발 선생은 이상룡 선생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일창 한약방’을 경영하며 독립운동 연락처로 사용하는 등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했다. 허형 선생의 외손자인 시인 이육사 선생도 외조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이 짐작된다. 허형 선생의 동생인 허필 선생의 아들은 허형식 장군으로, 북만주 일대에서 동북항일연군으로 활동하며‘만주 최후의 파르티잔’으로 불렸다. ▹왕산일가 독립은 험난하고 처절했다 일본군은 청산리전투에서 참패하자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켜 우리 독립운동 활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과 무참한 학살을 일으켰고 왕산 일가도 일본군이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서간도를 떠나 북간도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도 여의치 않자 허학 선생과 허국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1937년에는 소련 스탈린의 중앙아시아 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하여 험난한 세월을 보냈다. 이렇듯 왕산 일가는 독립운동으로 목숨을 위협받았고, 세계사의 정치적 격동으로 여러 나라로 흩어져 처절한 삶을 이어갔다. 2009년 구미시 임은동에 세워진 『왕산 허위 선생기념관』 개관식에서 이들 일족은 생전 처음 사촌 형제 등을 만났다. 100년 만의 만남이었다. ▹고난을 짐작했음에도 나라를 위한 고귀한 희생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회적 지위가 높고 명예가 있는 이들에게는 가진 만큼 기대되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 이를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한다. 그것이 요구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지위와 명예가 결코 그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이 어우러진 사회의 유기적인 관계가 작용한 까닭도 있기 때문이다. 왕산 선생 일가야말로 이를 누대에 걸쳐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말할 수 있다. 왕산 선생이 그 길을 가면서도 일족이 이런 험난한 세월에 처해질 것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한둘도 아닌 집안 전체가 왕산 선생과 뜻을 같이한 고귀한 기개에 기꺼이 고난의 세월을 견뎌온 숭고한 생애에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김종성 기자 gumiin@hanmail.net
-
(사)왕산기념사업회 주관, 왕산허위선생 춘계향사 봉행[구미인터넷뉴스]구미시(시장 장세용)는 4월 2일 11:00 (사)왕산기념사업회(이사장 박은호)주관으로 왕산허위선생기념관 내 경인사에서 왕산허위선생 탄신166주기 춘계향사를 봉행했다. 이번 춘계향사는 코로나19로 간소하게 진행되었으며, 장세용 구미시장이 초헌관, 김재상 구미시의회 의장이 아헌관, 박은호 (사)왕산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종헌관을 맡아 진행되었다. 왕산허위선생은(1855-1908) 구미 임은동 출생하여 청년기를 이 지역에서 보내며 유학과 경륜을 익혔다. 이후 국난으로 인한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 고종의 부름을 받고 대한제국 시기 평리원 수반판사와 재판장(오늘날 대법원장), 비서원 승(대통령비서실장) 등의 관직에 재직했다. 재직 중에도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거나 황국신문, 매일신보 등에 항일격문을 수차례 게재하는 등 폭넓은 구국활동을 펼쳤다. 1905년 이후 본격적으로 전국 의병 거병에 동참했으며, 13도 창의군 총대장으로 1908년 일본의 심장부인 통감부를 공격하기 위해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서울진공작전'을 진두지휘 했다. 1908년 10월 21일 서대문 형무소의 1호 사형수가 되어 순국하였고 1962년 대한민국은 왕산허위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이러한 왕산허위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서울특별시는 동대문구 신설동역 앞 도로를 1966년 11월 26일 '왕산로'로 지정했으며, 구미시에서는 2009년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을 건립하여 선생에 대한 추모와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날 향사에 초헌관을 맡은 장세용 구미시장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신 왕산허위선생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모여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독립운동에 투신한 왕산선생과 왕산가(家)의 대를 이은 독립운동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한 왕산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위대한 형제들 왕산 허위 선생의 큰형(허훈 선생)은 진보에서 일으킨 의병의 창의장이었고, 셋째 형(허겸 선생)은 왕산 선생의 김산(김천) 의병과 방산 선생의 의병 때 참여한 것을 비롯해, 신민회 회원으로 신흥무관학교 전신 신흥학교 설립, 군자금 모집 등 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왕산 선생의 순국 이후 일가는 일제의 감시와 핍박의 대상이 되었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허겸 선생은 유족과 사촌 형제인 허형, 허필 선생 등의 일가를 데리고 만주(서간도)로 이주했다. ▷왕산일가 독립운동 대를 이어가다. 왕산선생의 장남(허학 선생)은 21세에 경기도 연천에서 왕산선생이 일으킨 의병에 참여했다. 1913년 독립의군부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으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둘째 아들(허영 선생)은 연해주 등에서 광복군으로 활약했고, 셋째 아들(허준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총무와 경리부장을 맡았다. 허준 선생은 한때 김좌진 장군 집에서 함께 거주하며 청산리전투에서 활약했다. 넷째 아들 (허국 선생)도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했다. ▷왕산일가의 삶은 험난하고 처절했다. 일본군은 청산리전투에서 참패하자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켜 우리 독립운동 활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과 무참한 학살을 일으켰고 왕산 일가도 일본군이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서간도를 떠나 북간도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도 여의치 않자 허학 선생과 허국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1937년에는 소련 스탈린의 중앙아시아 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하여 험난한 세월을 보냈다. 이렇듯 왕산 일가는 독립운동으로 목숨을 위협받아, 여러 나라로 흩어져 처절한 삶을 이어갔다. 2009년 구미시 임은동에 세워진 『왕산 허위 선생기념관』 개관식에서 이들 일족은 생전 처음 사촌 형제 등을 만났으며, 100년 만의 만남이었다. 김종성 기자 gumiin@hanmail.net
-
해평면, 애국지사 백은 최재화 목사 추모식 개최해평면(면장 윤태호)에서는 3월 1일(금) 오전 11시 해평면 산양리 마을회관에서 제100주년 3․1절을 맞이하여 숭고한 독립만세운동의 의미와 나라사랑의 정신을 되새기고자 '3.1운동 100주년 기념식 및 애국지사 백은 최재화 목사 추모식'을 개최했다. 산양리 3․1동지회(회장 최영철)와 산양리 마을주민(이장 윤순현)들이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유족을 비롯한 마을주민과 내빈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마을회관에서 기념식을 열고, 추모 기념비 앞에서 만세삼창을 하면서 일제치하 당시의 독립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윤태호 해평면장은 “매년 삼일절을 기념하여 산양리에서 유가족과 마을 주민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추모행사를 개최하여 감사드리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신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계승·발전 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애국지사 백은 최재화 목사는 1892년 12월 해평면 산양리에서 태어나 1919년 선산군 해평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만주신흥무관학교로 피신 한 후 상해 등지에서 계속 독립운동을 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1954년 대구에서 선교사 아담스와 계명대학을 설립하고 제2대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과 교육에 헌신하였다. 김종성 기자 gumiin@hanmail.net